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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실제로 죽어갔다. 삶에 대해 절망하거나 아프고 힘든 척 방황할 만큼은 아니지만, 내 지난 날은 분명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그 죽음들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에 영화평 따위를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꼭 내가 느낀 것이 정리되거나 몇 자라도 끄적인 후에 영화평을 보거나 하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딱 한가지 사실만 확인했다.  실화인가? 확인 결과 실화다.

양심과 함께 신의 원초적 선물이라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모든 선택의 권한을 부여받고 타인의 죽음까지 선고하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떤 기사에는 철학적인 영화라고도 하고, 감독에 대한 칭찬으로 열을 내기도 하던데.. 나는 감히 "혁명적인 영화"라고 하겠다.

섯불리 말하지 못하는 주제. 죽음. 그것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자살의 존재적 가치에 대한 고민.. 뭐 그런 것들.

내가 이해하는 이 영화, 씨 인사이드에서 주인공이 죽고자 열망하는 이유와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서 그루누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고대 로마에서 삶의 연장으로서 자살을 인정 받았다는 것.. 이런 것들에 하나의 줄기가 있지 않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현재가치일 뿐이지, 그것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공통된 견해는 아니다. 아직도 어떤 곳에서 죽음은 자신의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으로서, 삶의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과 연장으로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축복으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다루어진 케이스처럼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단 1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사지마비 환자가 27년간 가족들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막상 그 자신은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내적 삶을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법에 호소한다. 스스로 죽기 위해서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지만, 세상은 마지막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을 영혼 깊이까지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나 그 여자의 도움으로 27년간 연구한 도와준 사람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방법으로 죽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영화다. 주제나 줄거리만 보면 어두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 자체는 결코 어둡지 않다. 오히려 밝다. 우리가 아는 모든 대상은 결코 하나의 측면만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음=슬픔 또는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학습된 우리들의 시선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한가지 측면에만 고정된 것과 같다. "죽음"도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며칠전 "존엄사"를 인정해달라고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사람의 소식이 있었다.
관련기사 링크 1, 관련기사 링크 2, 관련기사 링크 3, 관련기사 링크 4
 
위의 기사를 보는 순간, 이 영화 "씨 인사이드"가 생각나서 다시 한번 보게됐고, 대한민국은 언제쯤 이런 이슈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잘 살자"에서 "우선 살고 보자"로 시민들이 점점 더 원초적인 상태로 후퇴하면서 "죽음의 형태와 가치" 또는 "나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은가?" 등 삶에서 개인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기사가 반짝 연예인 기사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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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명랑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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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통 2008/05/14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이란,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
    삶의 의무를 지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선택한 생명, 삶이 아니 듯
    우리에겐 우리의 생명과 삶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통한 존엄이 아닌, 생명을 통한 존엄을 추구할 길은 없을까.

    단정적으로 말했지만 어려운 문제지요.

    • 명랑야수 2008/05/14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의 선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만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해봤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2. FlyDream 2008/05/14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영화 한번 보고 싶네요.

  3. 쿠바언니 2008/05/15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음을 선택한다는 오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많고 많은 중에 하필 죽음마저 선택해야할까요. 근데 "누가" 선택을 하는 거죠? 오직 죽음'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자신'밖에는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마저도 비난받지만 말이죠. 문제는 죽음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자를 "돕는" 행위라는 거죠.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선택에 대한 "권리"는 법적으로도, 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죽음을 돕는 행위 또한 그 자체가 권리도 의무도 아니기 때문에 또한 용인될 수 없습니다(환자가 치료를 거부해도 의사는 치료를 강행하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명확하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낯선 법학이나 철학의 개념을 재료로 쓰지 않더라도 "합법적"으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행위가 인정된다면, 당사자의l 1%의 생존가망과 1초라도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수천년에 걸쳐 축적된 인간의 의료행위는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요. 합의로 사람을 죽는 것을 돕는 행위, 죽어도 된다는 합의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러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국가"가 용인한다면 과연 정당한 것인가요? 애완견 목숨을 인간보다 우월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는 한은, 인간의 죽음을 "선택"의 문제로 치환해 사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 명랑야수 2008/05/15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럼에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자발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것이지요.

      또 우리가 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선택은 "더 좋아지겠지"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확신"한다고 하지만 그 확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대를 내비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선택과 결과가 분명한 1회적인 기회입니다. 이런걸 "기회"라고 부르는걸 동의한다면, 기회라고 할 수 있겠죠.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여러 선택지 중에 한기지일뿐 입니다. 선택의 기회없이 일방적으로 삶 속에 단져진 인간에게 죽음만을 특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속박은 불공평하다고 봅니다. 죽음이 그렇게 특별하다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죽음에 대한 선택 앞에 선행되는 고민과 번뇌만큼 깊어야겠지요.

  4. 쿠바언니 2008/05/15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은 상당히 관념적이고, 저를 설득하기에 부족한 논거들을 들이미셨습니다. 다른 것은 배제하고서라고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여러 선택지 중에 한가지"라고 하였는데, 여러 선택지에 대해 몇 가지만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동안에 어떤 일을 선택하여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못받는 경우에도 그것은 부정되어야 할까요. 극단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기 위해서 분수에 안맞는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빌려주시겠습니까. 인간이 죽음만을 특별하게 다루는 이유는 댓글에 전제와 같이 "1회"라는 전제에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확률에 비해 훨씬 높으며, 상식과 여론조사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겠지요. 과연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면, 특히 본인이 그 상황에서,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는가"를 설명한다면야 가장 납득 가능한 설명이 되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그리고 자살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안락 혹은 존엄사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했을 뿐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아마도(안봤습니다만), 안락사에 대한 것같습니다만. 사족이지만 영화평에서 언급하였듯이 죽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형편을 고려해 "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죽음을 선택하야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환자 자신이 인식이 가능한 상황에서 보조기구를 떼거나 약물을 주입하는 것과 칼로 찌르는 행위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 명랑야수 2008/05/16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관념"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네요. 사실과 견해의 경계는 불확실하고, 사실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순간 그것은 주관적인 견해에 속하게 되지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알려진 방법으로 반복적인 검증을 통해 밝혀진 그것을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지요.

      삶에 대한 여러가지 선택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을까 말까, 똥을 쌀까 말까..하는 문제도 모두 포함하는 하찮은 것부터 개인에게 아주아주 중요한 선택의 문제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 모든 선택의 기회를 모두 동등하게 다룰 수는 없으니, "죽음"이 그 기회들 중에 가장 상위에 속하는 선택이라고 한다면 죽음과 직적접으로 연관된 "건강"의 문제를 들 수 있겠죠.

      "죽음"에 대한 가치를 절대적으로 취급한다면, 살아있는 상태-즉 삶에 대한 가치도 절대적으로 취급해야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쓰레기 취급하지요.

      끊임없는 흡연, 과도한 음주, 위험한 운전, 불규칙적인 생활패턴, 타인에 대한 폭력 등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뿐 아니라 타인을 위험하게 만드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저지른다는 것은 삶에 대한 소중한 가치보다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저지르고 있는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억지력 확대의 노력이 중요하다면 삶에 대한 가치회복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죽음과 삶을 동등하게 다룰 때만 죽음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요. 이따위 고민들도 건강한 사람들의 사치스런 고민이겠지만.


      ps. 그리고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 댓글이 붙은 포스트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근거해서 작성한 것 입니다. 글쓰기의 용도가 꼭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는 아닙니다. 나의 견해에 공감한다면 감사하고 반가운 것이고, 아니라면 상대방의 견해에 귀기울이는 것이 최선이지요. 글 몇자, 말 몇마디로 상대의 견해가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많은 책들 속에서 내 견해의 판단 근거를 발견하고 바뀐적은 있지만, 나의 견해 자체가 바뀐 경험은 몇 번 없었다고 기억합니다.